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(문단 편집) == 발단 및 암살 계획 == >'''비정상적인 시대에는 비정상적인 방법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.''' >---- >[[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]] [[대령]]의 일기 중[* [[루트비히 베크]]의 말이라는 설도 있다.] >“미친 운전기사가 버스를 몰고 있을 때, 기독교인의 본분은 그 버스에 치어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러 주고 기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운전기사를 끌어내리는 것이다.” >----- >[[디트리히 본회퍼]] 목사 > 1944년 7월 20일에 이루어진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 시도는 배경사가 길다. 이 배경사에서 깊이 얽혀서 드러나는 것은 드높은 윤리 의식, 숭고한 도덕적 의무감, 명예율, 정치적 이상주의, 종교적 신념, 개인적 용기, 보기 드문 이타심, 강한 인간애, 나치의 국수주의와는 몇 광년은 떨어진 조국애 같은 것의 복잡한 가닥이다. 이 배경사는 또 불화, 의혹, 실수, 착오, 도덕적 딜레마, 근시안, 우유부단, 이념적 균열, 개인적 반목, 엉성한 조직, 불신, 순전한 불운으로 가득차 있다. 당시 상황에서 어떻게 안 그럴 수가 있었겠는가? >----- >이안 커쇼 - 히틀러 2권 14장 (악마의 행운) 802 page [[독일 국방군]](Wehrmacht), 특히 [[육군]](Heer)은 [[프로이센]]의 군대라는 정통성과 자부심이 강했고 정치적 영향력도 큰 데다 [[나치]]의 영향을 거부하는 통칭 [[융커]]라고 불리는 노장 보수파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다. 이들뿐만 아니라 18세기부터 이어져 온 [[프로이센]]의 유명한 군인 집안 출신 장성들도 상당했다.[* 대표적으로 [[에리히 폰 만슈타인]], [[에발트 폰 클라이스트]]. 자세한 내용은 [[융커]] 문서 참조. 다만 만슈타인은 타 융커들에 비해 친나치 성향이 강하였다. 그러나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나치가 [[바이마르 공화국|바이마르 정부]]를 장악하던 시기에 이들은 군비 확장을 주장한 나치에 대하여 대체로 동조적인 태도를 취하였다는 것이다. 이들 중 일부가 나중에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기는 하였으나 그 시기는 이미 나치의 패배가 어느 정도 점쳐질 시기였다.] 육군의 정신적 지주였던 [[파울 폰 힌덴부르크]] 등의 지향점은 바로 '''[[독일 제국|독일 제2제국]]'''으로, [[바이마르 공화국]] 시대 육군 상층부의 목표는 '''[[전제군주제]]'''[* [[황제]] 제도, [[귀족]] 제도 등]을 복구하는 것이었다. 퇴역 군인이 중심이 된 [[철모단]] 등의 사상도 이와 유사하다. 이들의 관점에서 보기에 나치는 [[포퓰리즘|대중주의]] 같은 것을 내세워 민중을 선동하고 머릿수만 끌어모았지 (귀족 혈통이나 신분, 과거의 지위라는 측면에서) 국가 지도자로서의 정통성이나 자격은 없고 별 같잖은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인 수준 낮고 근본 없는 집단이었다. 한마디로 '''어르신들'''이 보기에는 영 탐탁지 않은 집단이었던 것. 독일 군부 계통 정치 세력과 나치가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것은 어디까지나 [[반공주의]], [[반민주주의]]라는 이념 면에서 공통분모가 있었으며 나치의 세력이 워낙 급격히 커졌기 때문이었고 프로이센 [[군국주의]]와 [[나치즘]] 사이에는 의외로 갈등의 소지가 깊이 잠재되어 있었다. 같은 [[독일 국방군|국방군]]에서도 [[크릭스마리네]](해군)와 [[루프트바페]](공군)는 규모가 작았던 데다 해군은 총수였던 해군[[원수(계급)|원수]] [[에리히 레더]] [[제독]]과 [[카를 되니츠]] 제독 등이 전반적으로 '''국가'''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편[* [[나치당|특정 정치집단이나 정당 등]]에 대한 충성은 경계하는 편이었으나 일단 누가 정권을 잡든 현재의 정권에 닥치고 충성하라는 경향에 가까웠다. --아니 무슨 [[바랑인 친위대]]도 아니고-- 일부 해군 내 광적인 친나치 인사들도 존재했으나 육군이나 공군에 비해 그 활동이 미약했던 것은 이런 분위기 탓도 있다.]이었고 공군은 총수였던 제국원수 [[헤르만 괴링]] [[장군]] 등의 성향에 따라 제2의 친위대에 가까울 만큼 친(親) [[나치]]적인 조직이었으며[* 시기적으로 이때에 공군이라는 조직이 별도로 구성된 국가가 거의 없었다. 당장에 미국은 [[제2차 세계 대전]]이 끝나고 나서야 육군 항공대가 공군으로 독립했으며 일본도 육군과 해군에 별도의 항공대가 존재하였다. 영국은 [[영국 공군|공군]]이 존재하였으나 영국에게 있어서 육군이 본토가 아닌 [[식민지]] 방위 담당에 가깝다라는 것을 생각하면 특이 케이스라고 봐야 한다. 그러나 독일은 공군 출신 [[괴링]]이 나치당 내에서 얼굴마담으로 국회의장까지 하는 등 몇 명의 2인자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인하여서 조직된 측면이 크다.] 또 해공군 모두 툭하면 [[육방부]]화를 시키려던 육군에 그닥 좋은 감정을 가진 편이 아니었으므로[* 나치 집권 초기에 군을 확장하면서, 육군은 육군총사령부(OKH)의 권한을 키워 사실상 육군이 곧 국군처럼 굴려고 하였고 해공군은 이에 반발하여 상급 기관인 국방군총사령부(OKW)의 권한 강화를 보다 원하고 있었다. 육군을 눌러둬야 했던 나치 정권 입장이 마침 이들 해공군과 맞아떨어진 점도 있다.] 이런 반(反) [[나치]] 성향 운동은 전반적으로 육군 장교들이 주도하게 되었다. 히틀러는 이러한 국방군을 장악하기 위해 이 노장들을 죽이거나 쫓아냈다. 그러자 이에 분노한 국방군, 특히 육군 내 장교들은 반히틀러 세력을 규합하여 히틀러를 암살하고 [[쿠데타]]를 일으킬 것을 모의했다. 1938년 [[주데텐란트]]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전쟁 발발의 기미가 보이려던 때 [[오스터 음모|반(反) 히틀러 세력이 쿠데타를 모의한 것이 대표적이었으나]] [[뮌헨 협정]]이 이뤄지면서 쿠데타를 취소했고 [[제2차 세계 대전]]의 발발로 계획은 차후로 미뤄졌다. 하지만 그때 쿠데타를 준비하던 인물들은 고스란히 남아서 7월 20일의 암살 음모까지 준비했다. 7월 20일의 암살 시도, 즉 이 문서에서 다루는 암살 시도 이후 반(反) 히틀러 세력이 대거 [[숙청]]되면서 쿠데타 및 암살 시도는 종전시까지 소강 상태가 되었다. 전쟁이 진행되면서 [[스탈린그라드 전투]]의 패배와 연합군의 [[노르망디 상륙작전]]으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국방군 내 반(反) 히틀러 [[비밀조직]]인 '''[[슈바르체 카펠레|검은 오케스트라(Schwarze Kapelle)]]'''는 히틀러를 암살한 뒤 1942년에 세워진 비상 계획 [[발키리 작전]]을 이용하여 독일 국내를 장악한 후 미국 및 영국과 종전 협상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. 가장 중요한 히틀러를 암살하는 임무는 독일 육군 보충군(Ersatzheer)[* 보충군이란 예비군보다는 한국으로 치면 동원사령부와 교육사령부를 합친 것 비슷한 개념인데 독일 국내의 13개 군관구 전체를 통제하는 행정사령부로서 각 군관구는 각 육군 사단들과 직결되어 육군의 신병 모집 및 동원병력 보충, 국내에서의 군사훈련 등 군정 업무를 맡았다.] 참모장교인 [[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]] [[기갑]][[대령]]이 맡기로 했다. 슈타우펜베르크는 [[북아프리카 전역]]에서 큰 부상을 입어 왼쪽 눈과 오른팔, 그리고 왼손 손가락 두 개를 잃었기 때문에 몸수색도 그리 까다롭게 하지 않는 편이어서 히틀러에게 접근하기 용이한 인물이었다.[* 원래 작전 실무를 담당했던 육군 소장 한스 오스터 장군이 있었다. 하지만 오스터가 [[유대인]]을 몰래 빼돌려 주다가 체포된 바 있었기 때문에 슈타우펜베르크를 포섭하게 된다.] 이에 따라 슈타우펜베르크는 폭탄이 든 서류가방을 들고 히틀러가 머물던 [[독소전쟁|동부전선]] 사령부인 [[볼프샨체]](Wolfsschanze)에 가서 히틀러의 회의실에 서류가방을 놓고 나오기로 계획을 세우고 조금이라도 의심을 덜 받도록 거사 몇 달 전부터 서류가방을 들고 다니는 용의주도함까지 보였다. 계획의 대략적인 내용은 슈타우펜베르크가 폭탄을 놓고 와서 히틀러가 사망하면 독일 보충군 총사령관인 육군 [[상급대장]] [[프리드리히 프롬]] 장군이 발키리 작전을 발동하여 독일 국내를 장악한 후 육군 상급대장으로 퇴역했던 [[루트비히 베크]] 장군이 임시 대통령[* 한국에는 흔히 국가대통령 내지 임시 대통령의 직위에 취임할 계획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작 독일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. 베크는 [[바이마르 헌법]]상의 국가대통령(Reichspräsident)이 아니라 국가섭정(Reichsverweser)으로 취임할 예정이었다. 왜냐하면 애초에 7월 20일의 암살을 모의했던 일련의 육군 장교들은 바이마르 헌법의 부활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프로이센의 [[호엔촐레른]] 가가 다시 [[프로이센 왕국]]과 [[독일 제국]]의 제위를 잇는 의회주의적 [[군주제]] 국가를 수립하려고 했기 때문이다. 이 때문에 이 계획에 참여한 [[독일 사회민주당|사민당(SPD)]]계열의 정치가들과 장교들 간에 의견 충돌이 있었다.--그런데 당시 히틀러 자체가 [[파울 폰 힌덴부르크|힌덴부르크]] 사망으로 독일의 총리 겸 대통령 대행 및 나치당의 당수, 곧 '''국가와 나치당의 퓌러(지도자)'''라는 괴상한 직위에 앉아 있었다. 이에 따라서 임시대통령이던, 섭정이던 아무 상관이 없었다.--], 라이프치히 시장을 지낸 유명 정치인 카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(Carl Friedrich Goerdeler)가 수상, 육군 원수 [[에르빈 폰 비츨레벤]] 장군이 국방군 총사령관을 맡는 것이 었다. 그리고 실질적인 암살 작전을 입안, 기획했던 실무자인 육군 [[대장(계급)|대장]]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(Friedrich Olbricht) 장군과 [[소장(계급)|소장]] [[헤닝 폰 트레슈코프]] 장군이 각각 국방장관과 경찰총감을 맡기로 하였다. [[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]] 대령이 국방차관으로 임명되어 [[미국]] 및 [[영국]]과 종전협상을 벌이면서 [[소련]]을 막는다는 복안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